21일간 노사 합의를 지켜줄것을 요구하고 파업에 돌입했던 이랜드 노조에 결국 공권력이 투입되었습니다. 인간을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소비재로 만드는 현실이야 익숙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라는 느낌으로 관찰해오던 투쟁인지라, 아쉬움이 큽니다. 간단히 몇자 긁적여 봅니다.
좀더 읽으려면
모든 폭력은 지양되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러한 폭력이 '나'를 향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폭력에 의하여 '내'가 '나'를 배신하게 되는 것은 극도로 혐오스러운 일이라는, 개인주의적인 이유에 의하여, 폭력은 지양되어야 한다.
특히나, 이러한 개인들의 집단을 추구하는 근대 민주 사회는 폭력의 지양을 그 방향으로 삼아왔으며,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각 장에서, 폭력의 방법은 추방되고, 추출되어 왔다.
하지만, 일부의 폭력성은 근대 사회에서도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공권력이 본질적으로 폭력을 그 바탕으로 한다는 것 자체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민사회는 어째서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눈감고 그것을 지원하는가? 공권력이라는 것이 성립한 배경을 생각해보자.
공권력이 '공'권력인 이유는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공화국의 시민들이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한 힘으로써, 정부에 '빌려준' 힘으로써, 그것이 사용되는 자리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철저히 공공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최소한,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서도 안되며, 그것을 빌려준 공화국의 시민들에게, 부적절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이 공권력이 가지는 폭력성에 대하여, 공화국의 시민들이 정당성을 부여하고, 참고 인내해주는 유일한 이유가 된다. 특히나,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되는 형식으로 사용되는 경우, 그것은 '공'으로서의 자질을 잃고 단순한 폭력과 동일한 위치에 서게 된다.